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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

이이체 <죽은 눈을 위한 송가> 본문

이이체 <죽은 눈을 위한 송가>

보통의 성연 2017. 7. 2. 22:58

죄의식과 죽음으로 범벅된 삶 속에서는

눈을 뜰 수가 없다

성연

 

 

 

 

 이이체의 <죽은 눈을 위한 송가>에 드러난 의식들은 단절되어있다. 시행마다 표면적 통일성을 보이지 않고 생략과 비약이 심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할 수 있다. 특히 시행 구분이 없는 산문 형식을 취해 표면의 논리를 일체 부정하여 시 속 세계를 한 겹 더 숨긴다.  또한 시 속 화자들은 모두 죽음과 같은 것들을 노래하고, 드러난 시어들도 모두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를 어떠한 관련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해 읽는 이에게 낯설음을 선사한다.

 

 

지난 밤하늘과 저녁노을의 얼굴을 본받는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차피 얼굴들은 완벽할 수 없다. 부엌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내 얼굴처럼 희고 환하다. 엄마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타구니가 서서히 가렵고, 따갑기만 한 내 털들. 엄마,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내가 엄마에게 말한다. 스킨로션과 마스카라, 파우더팩트, 비비크림, 짙은 쥐색의 아이라이너, 붉고 푸르고 하얀 알렙들. 어머니가 아끼는 노란 접시들이 채 맑아지지 않은 세제 거품들을 산란하고 있다. 엄마, 몇 톨의 방향제로도 꿈을 이룰 수 없어요. 화장한 내 얼굴이 맘에 들지만 역겨워서 몇 차례 토했고, 나는 내 불편한 베개만큼 날씬해지는 꿈을 꾼다. 거듭 거꾸로 돌게 되는 바람개비처럼 어지럽다. 이 정도면 어머니를 닮은 얼굴인가. 접시에 기생하는 세제 거품들이 여드름처럼 우악스럽게 익어간다. 새끼에게 밥을 주기 전, 둥지를 교태롭게 맴돈다는 어미 새의 이야기는 꿈이 아닌 셈이다. 알렙들, 반복은 없고 부엌은 유년의 바람개비이다. 이 화장을 지우고 또다시 화장을 하면, 하나의 얼굴을 버릴 수 있을까. 고개를 돌린 태양이 창가로 들어와 무덤덤하게 접시를 어루만진다. 어머니가 묻는다. 바람이 불고 있니? 세재로 립스틱을 닦으며 내가 대답한다. 아뇨, 내가 만드는 바람만 있습니다.

 

 

- 화장일기 이이체 <죽은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 지성사 14p

 

바람은 불지 않고 '내가 만드는 바람'만 존재한다. 이런 바람에 바람개비는 거꾸로 돈다. 이처럼 <죽은 눈을 위한 송가>의 시세계는 대체적으로 폐쇄적이고 인위적이며 분열되어있다. 시 속에서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얼굴-화장과 어머니-바람-부엌의 접시와 세제(설거지)의 이미지가 교차되며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움에 다가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렇지 못하여 화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얼굴은 역겨워 토하고 베개가 불편한 만큼 잠에 들지 못한다.

 

 

나열된 이미지에 대한 얄팍한 생각들

 

 

 '부엌'의 이미지는 개인적으로 항상 유년 그리고 어머니와 맞닿아있다. 한 집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안다. 내 방, 거실, 혹은 부모님의 방, 형제의 방 모두 유년의 추억이 묻어있지만, '부엌'은 대체로 어머니가 무언가를 요리하여 가족들과 식사로써 규칙적으로 타자와 만나는 공간이다. 또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설거지로 하여금 부엌을 정리하고 다시 재생하는 공간이다. 어린 아이의 눈에 부엌에서의 어머니는 신과 같이 큰 존재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화장'의 행위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화장한 얼굴은 자신의 실제의 모습이 될 수 없다.

 '불편한 베개'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베개와 이불이 얼마나도 불편한지.

 '새끼에게 밥을 주는 것' 둥지를 '교태롭게' 도는 것에서 어머니에 대한 어떠한 에로티시즘까지 덧칠해 느껴진다.

 마지막 행의 '바람'은 날씨의 바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위한 소원의 동음이의어를 노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알렙'이라는 시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렙은 그 유명한 남미 거장 보르헤스의 작품이다. '알렙'은 환상과 실제를 뒤섞는 다는 뜻을 가진다. 카오스적 세계를 의식 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전복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 시 역시 환상과 실제를 뒤섞음으로써 우리의 인식 세계가 어떠한 내재적 논리, 통일성을 갖춘 이성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해체와 단절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밤처럼 흘러내려온 영화관의 말석을 마주보며 스크린이 깔렸다.

자막은 나의 피부였다

본적 없는 꿈이 영사기 바깥에 있었고 눈먼

나에게 꿈은 이미 음악이었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야말로 가장 음악적이었다

 

노랫말이 끝날 무렵에야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감정 이상이고 내가 살아갈 날들이란

인생 같은 영화 한 편일 것임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온 세월이 죄악이었고

나는 조조할인만큼도 용서받지 못했다

유배지에서는 자막을 읽을 수 없었음에도 나는

죄의 삯으로 눈이 보이는 순간들을 부여받았다

장면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음악들은 각자의 면죄부를 흥얼거렸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나는

한마디 대사조차 듣지 못했지만 노랫말은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죽음 같은 장면들이었다

피부를 갖지 못한 음악들이 꿈을 꾸었으며

꿈속에서만 매진된 영화로 스크린은 피범벅이 되었다

용서받지 못한 이들은 면죄부를 연주할 수 없었다

 

 

 자각몽 이이체 <죽은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 지성사 40p

 

  이 시집에서는 '영화'와 관련된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영화와 바다, 연인은 가장 자주 나오는 이미지다.) 영화와 꿈의 세계가 얽힌 '자각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각몽은 꿈 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은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생 같은 영화 한 편' 이라는 구절에서, 영화와 꿈이 얽힌 세계가 곧 삶의 세계와 이어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내세의 시간에서 창조주가 혹은 죽은 미래의 자신이 내려다 보듯 인식함이 드러난다. 이는 이이체 시의 전반에 느껴지는 화자의 원죄의식과 죽음과 가까이에 놓여있는 삶과 맥을 같이한다. 

 이미 죄를 지어 용서받지 못한 생애의 엔딩이 마치 정해져 있는 듯 하다. 내가 살아가는 날들은 영화, 꿈과도 같은 순간이다. 나는 감정 이상의 것들을 느끼고 있지만 보이는 것만을 믿고있다. 그러나 그 삶의 내용은 죄값을 치루는 비극으로 점철되어있다. 이 시에서도 '나'는 용서받지 못한다. 시집 전체에서 나타나는 보는 것의 한계, ('죽은 눈- 제대로 볼 수 없다')를 직시해야 한다. 결국 눈이 보이는 '순간'으로 인해 괴로움은 배가 된다.   

 

 

 

앵무조개 껍데기들을 모아놓은 하얀 상자

이 형벌은 예지몽으로부터 이어진다

죄수들은 죄짓지 않고도 삶을 수감당했다

 

가장 창백한 불꽃과 가장 가까운 물결이 사랑이다

 

곤충의 정교한 눈

이 눈에는 더 많은 눈들이 있는데,

너는 다 헤아일 수 있겠니

 

기적 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안주하게 되던

죄악과의 재회

 

천식에 걸린 바늘의 끄트머리로부터 서서히......

 

어떻게 젖어야 할까, 눈물로 싸인 눈동자들

서로 알지 못하는 노래

풀과 나무를 갖지 못하는 불임의 모래를

잊지 못하리라

유년의 꽃반지, 시들 줄 알면서도

 

우리는 뭍에 갇힌 심해어야

소라 껍데기가 매일 우리를 부르지

 

사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밀월이 온다

호박 등불이 영롱하게 빛을 반주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긴 바다표범이

꾸역꾸역 울고 있었다

눈발은 자주 흩어졌다

 

무엇인가 더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끝이 없는 것이다

 

출생하면서부터 시간의 포로가 된 채로 그렇게

 

방패연을 날리다가 하늘에 흘려버리고는

양피지에 기록된 낡은 모계의 신화를 믿고,

믿고, 또 믿으면서 연거푸 울고, 연거푸 울면서

 

그대 인간이라는 껍데기 안에서

새우잠 자는 원죄여

끊어지지 않는 탯줄처럼 이어질 테지

 

입을 벌린 채 내장을 흘리고 누운 통조림들

 

이미 다 끝나 있는 일을 계속하려 하는 중이다

 

인생에서 탈옥하지 못한 실패자들

 

떼로 죽어 널브러져 있는 갈매기 시체들 주위,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굶주린 부리를 치켜들고

 

모든 시인들은 표절당한 요절 때문에 격앙되어

울화병으로 곪고 썩는 것이다

 

우리가 함구해야 할 인과율에는

알면서도 외면해야 하는 모순이 있었다

 

어차피 늙어간다는 것은 아물어가는 일이다

육체란 이미 상처 그 자체이므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정적

 

소풍 가자 잘못된 삶들아

우리 나가서 모두

죽자

죽자

죽자

 

 

인간론 이이체 <죽은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 지성사 98p

 

 이 시 전반에는 삶에 대한 인식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일단 첫 행에서 또 드러난다. 인간은 죄지은 자고, 삶은 뭍에 갇힌 심해어같다. 그렇기에 삶은 감옥이고 죽음은 자유의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 나가서 모두 죽자'고 화자는 요청한다. 삶이 오히려 죽음처럼 죽음이 오히려 삶처럼 되었다면 체념하면 된다. 그러나 화자는 항상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자기의 실존을 의심하고 어색해 한다. (수면제, 131p)  우리는 이 시에서 화자가 고통받는 이유를 조금 엿볼 수 있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원죄 의식은

모계신화에 대한 믿음 (화장일기에서 부터 이어지는 어머니, 생명에 대한 집착) 

무엇인가 더 있어서 끝없는,  수없이 많은 '눈'으로 채워져있는 곤충의 눈에 대한 관심

들로 하여금 미련으로 범벅되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비탈길에서 녹은 눈이

쓸려 내려간다

허수아비처럼 심심한

내세마저도 파문으로 일렁인다

너는 늘 새롭고 외롭구나

사이비 진술이어야 하는 명제

왜 날조되지 않았음에도

청춘을 저당 잡히는 것인지

네가 선 갈대밭이 누렇게 운다

황혼이라는 파국에도

영혼들은 위장되어버릴까

평생의 결핍으로

분홍 꽃물을 끼얹은 저물녘의 노후

그러고도 너는

웃을 수 있겠니

예쁘지 않게 웃을 수 있겠니

 

 회문 이이체 <죽은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 지성사 62p

 

'사이비 진술', 시론에서 나오는 용어다. 사실성과 멀어졌지만 오히려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시의 진술을 의미한다. 저당잡힌 청춘은 일체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사이비 진술처럼 보이지만, 전혀 날조되지 않은 '사이비 진술'이다. 황혼과 갈대밭이 펼쳐진다. 그 순간에 위장될 수 있을지 화자는 묻지만, 화자는 안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죄졌다고 인식한 순간, 스스로를 속일 위장이란 없다는 것을. 저물녘의 낙조에 서서, '나'는 평생의 결핍에 물든 아름다운 그 찰나에 서있다. 예쁘지 않게 웃으면서 말이다.

 

 이이체의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에서는 죄의식과 삶의 순간을 부정하면서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시들에서 특정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1인칭 진술인 '나'가 자주 등장하여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녹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세계에서 보여지는 단절감이 역설적으로 삶에 천착으로 가득차있는 진실함으로 다가온다. 그가 느끼는 삶의 비극이 이만한 낯설음 만큼이나 절실했다는 것이 생생하게 다가와 나는 이 시들에게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가라앉을 때는 최후까지 가라앉게 하는 시들이었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왜 내 이름이 아닌지 궁금해 졌다. - 고아孤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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