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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

오래된 미래 : 최인훈 <광장> 본문

소설

오래된 미래 : 최인훈 <광장>

보통의 성연 2017. 6. 27. 01:17

 

믿음과 사랑을 영원히 구한다는 것은

성연

 

 

 지식과 믿음은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사람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주장할 것이나, 그런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 그것은 진리가 아닌 잘못된 지식일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현대 철학은 지식과 믿음을 별개의 개념으로 다룬다. 그러나 <광장>의 명준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웅처럼 자신의 삶에서 진실한 믿음을 구한다. 이러한 인물이 남한과 북한 체제를 포착한다면 어떤 사유와 경험을 하게 될까?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최인훈, 광장 서문, <새벽>, 196010)

 

작자인 최인훈은 광장은 풍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장에 있고자 한 친구의 얘기라 하였다. , 세상에 널린 많은 풍문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여 직접 진리를 찾고자 길을 떠난 한 청춘의 모습을 광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 사회 소설에서의 명준은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근대 소설의 주인공은 결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다.이데올로기의 갈등, 허위와 모순은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이 된다. 무언가를 믿고자 하는 마음은 좌절만을 키울 뿐이다. 결국 문제적 주인공인 명준은 계속 어딘가로 떠나게 되고 갈등, 좌절을 경험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극적 운명은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 대학교 3학년 철학과 이명준

 

 명준은 3학년을 마쳐가는 대학생으로 설정되었다. 특히 4학년이 아닌 3학년의 끝 무렵으로 설정되어 미완의 이미지가 더욱 덧칠해진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더욱 초조해져 나와 그 주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인터넷 유행어 중에 3학년은 사망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명준도 그랬다. 심지어 명준은 철학과 학생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반 학생보다 더욱 깊은 사유와 고민들로 점철되어 방황했을 것이다.

 

철학과 3학년이다. 철학과 3학년쯤 되면, 누리와 삶에 대한 그 어떤 그럴싸한 맺음말이 얻어지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곧이어 겨울방학이 될 3학년 가을, 아무런 맺음말도 가진 것이 없다. 맺음? 맺음말이란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누리와 삶에 대한 맺음말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날엣날마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치르는 모든 따위의 일이라면 아무런 뜻도 거기서 찾지 못한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낯 씻고 학교에 와서 교수의 말을 시시하다면서 적어두고, 또 집에가고, 비가오면 우산을 받고, 누가 가자고 끌면 영화 구경을 가고 () 삶을 참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책을 모조리 찾아 읽는다. () 쉴새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가면서 살 수 있는 삶. 명준이 찾는 삶이다. 아무 일에도 흥이 안 난다.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가 없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그런 일이 없을까? (광장, 문학과지성사 33-37p)

 

날마다 보고 느끼는 것에서 뜻을 찾기 어렵다. 무언가에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기에 모든 것이 부족하다. 명준에게 하루하루는 지루하고 무기력했을 것이다. 근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너리즘에 빠진 명준은 문제적 인물답게, 쉴 새 없이 움직여 어딘가에 마음을 쏟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책을 모조리 찾아 읽는다. 그게 대학생으로서 삶에 진심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방황은 개인적 이유에서만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당시 남한은 북한과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으면서 혼란한 상황이었다. 정선생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에 대해 명준은 깊은 성찰과 회의를 내비친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선량한 시민은 오히려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창을 닫고 있어요. (광장, 문학과지성사 55-56p)

 

제대로 된 광장은 없고 밀실로만 넘쳐나는 남한의 정치 체제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는 아버지로 인해 수난을 당하고 취조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여실히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연인인 윤애는 명준에게 신뢰와 안정을 주고 육체적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를 충족시키는 듯 보였다. 이에 명준은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녀를 소유했다고 믿었으나 결국 그녀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연인에게도 믿음을 구할 수 없는 그는 얼마나 아팠을까.

 

제가 뭔데요? 분명히 그녀와 나란히 서 있다고 생각한 광장에서, 어느덧 그는 외톨박이였다. 발끝에 닿은 그림자는 더욱 초라했다. 그녀의 저항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이면 그녀의 허벅다리는 그의 허리를 죄며 떨었으니깐. () 그는 끝내, 윤애의 몸에서 똑똑한 응답을 받아 보지 못했었다. 깡그리 그녀를 차지했다고 믿기가 무섭게 그녀가 보이곤 하던, 알 수 없는 버팀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물건을 만지려고 할 때처럼, 밑창 없는 안타까운 허망 깊이 그를 차 넣었었다. 사람의 사귐이 몸의 그것조차도 얼마나 믿지 못할 길인가를 말해 주었다. (⋯) 윤애 날 믿어줘, 알몸으로 날 믿어줘 (광장, 문학과지성사 110p, 156p, 187p,)

 

연인과 남한체제에 대한 일말의 믿음은 마치 욕조에 받아둔 물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듯 좌절된다. 결국 그는 월북하게 된다.

 

 이처럼<광장>에서 명준은 삶에 깊은 사유를 가진 철학과 대학생 3학년으로 설정되고, 믿음을 구하는 진실한 청년으로 설정되어 남한의 정치사회 상황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대한 회의, 인간적 방황 등의 고민이 독자들에게 절실히 드러난다.

 

 

 

2. 북한과 아버지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는 명준

 

 명준은 북한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는 특히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져 심화되어 나타난다. 반일 투사며 이름 있는 코뮤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생활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그의 아버지 역시 허위로 가득 차있었다. 명준은 토해내듯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당신과 인민공화국에 대한 실망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그의 부친이 맞받아주기를 기다렸지만 역시나 답이 없다. 이에 목을 젖히며 웃다가,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역시 좌절되는 순간이다.

 

그날 밤 늦게, 부친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자기 방에 들어서는 기척에, 숨을 죽였다. 불을 끈 다음이었다. 부친은 그대로 그의 머리맡에 서 있다가 쭈그려 앉더니, 그의 어깨 언저리 이불깃을 꼭꼭 여며주는 게 아닌가. 명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슬펐다. 아버지는 이런 사랑 밖에 내게 줄 수 없단 말인가. 이튿날, 그는 하숙을 정하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와 자기는 이제 남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월북해서도 신문사 같은데 있었다는 일이 좋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광장, 문학과지성사 118p)

 

광장은 명준을 초점인물로 설정하여 아버지의 입장이나 일체의 변론은 일절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런 변론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명준의 이불깃을 여며주는 장면은 슬프기도하고 복잡한 감정을 독자들, 명준에게 전해 준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변화에 대한 명준의 좌절감이 더욱 공허하게 드러난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버지와의 만남과 절연으로 모순적인 북한 사회구조에 대한 회의가 한 층 깊어진다. 북한 시민들은 어떤 대의와 이념을 갖고 살지 않으며 열기 띤 얼굴 또한 갖고 있지 않다. 북한 안에서 일어난 혁명은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으며, 남한이 광장 없는 밀실이었다면 북한은 밀실 없는 광장이었다. 북한 역시 그의 믿음과 이상에 대안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결국 명준은 북한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3. 명준은 악마 또한 될 수 없다

 

 명준은 북한에서도 은혜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며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남한에서처럼 대칭적으로, ‘자아 비판회를 통해 사상적 폭력을 겪어 북한의 이데올로기에 역시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다. 그 후 은혜와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지만, 그녀 역시 거짓을 고한 후 모스크바로 떠난다. 이에 그는 전쟁의 상황에서 정치보위부의 폭력의 주체가 된다(이 장면이 꿈이라고 여기는 것을 어디선가 보았는데,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다.) 사랑하는 여인이 배신하고, 북한의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명준은 이 순간에도 무언가에 다다르고자 한다.

 

이런 기관에 온 것도, 내가 자원한 일이야. 나는 이번 싸움을 겪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아니 비로소 나고 싶단 말이야. 이런 전쟁을 겪고도 말끔한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내 손을 피로 물들이겠어. 내 심장을 미움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돌아가야겠어. 내 눈과 귀에, 원망에 찬 얼굴들과 아우성치는 괴로움을 담아가져야겠어. () “너는 악마도 될 수 없다?” 그는 마주서 있는 사람에게 대고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물어봤다. 그는 또 손뼉을 쳤다. 빈방 밤시간에 그 소리는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호탕하게 한 번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목구멍 속에서 나온 소리는 정작 약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뒤통수를 도어에 탕탕 부딪히면서 언제까지나 웃고 있었다. (광장, 문학과지성사 147p, 153p)

 

충실한 악이라도 되고자 했던 명준은 남한에서 알고 지낸 태식을 고문하고, 사랑했던 여인 윤애를 강간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을 해코지 할 수 없다. 그는 악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명준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직접 자원하여 악이 되려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장면에서 명준의 순수하고도 진실한 삶의 태도가 좌절되는 비극적 상황이 독자들에게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4. 명준의 마돈나, 은혜마저 전쟁은 앗아가고

 

 그때 마침 은혜가 다시 돌아온다. 그는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국 명준은 그녀를 한 치의 의심 없이 다시 믿을 수밖에 없다. 전 여인 윤애, 아버지, 태식, 혹은 남북한의 사회구조는 그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깊은 회의만 던져줬지만, 자신에게 진심이었던 사랑하는 여인인 은혜는 한 순간에 용서할 수 있다. 이런 명준의 모습에서 결국 인간은 진실한 사랑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전쟁의 상황 중 동굴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펐다. 침실로 도피하는 연인이 나타나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 어느덧 첫닭이 울고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촉()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메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함께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파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나의 침실로> 이상화

누워서 보면, 일부러 가리기나 한 듯, 동굴 아가리를 덮고 있는 여름풀이,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 바닷풀처럼 너울너울 떠 있다. 접은 지름 3미터의 반달꼴 광장. 이명준과 은혜가 서로 가슴과 다리를 더듬고 얽으면서, 살아 있음을 다짐하는 마지막 광장. 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 (광장, 문학과지성사 164p)

 

<나의 침실로>에서의 마돈나’, 그리고 명준과 은혜는 침실과 동굴로 도피해 사랑을 나눈다. 전쟁의 상황에서 명준과 은혜는 그들의 도피처인 동굴에서 내일이 없는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아진 죽음을 생생히 인식하고 있다. 침실과 동굴 밖의 현실의 암담함과 그들의 사랑사이에 놓인 거리감이 너무나도 크다. 그렇기에 죽음을 오히려 아름답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인식하여 이로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에서 의 간절한 부름에도 마돈나는 오지 못하며, 죽음 역시 실제로 이루어 질 수 없다. 마돈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여인이고, 죽음은 현실적으로 삶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도피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명준과 은혜 역시 이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현실의 세계는 전쟁의 폭력으로 하여금 명준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믿음인 은혜를 뺏어간다.

 

 

 

5.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믿고 싶어 했다. 일체의 거짓과 허위를 용납하지 못하였다. 연인인 윤애와 은혜에게도 그런 잣대를 계속 들이댔다. 또한 아버지의 삶과 남·북한 사회의 이데올로기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순간에는 악마까지 되고자 하였다.

 

순례자가 일생에 몇 번이고 성지를 찾아 의심을 죽이고 믿음을 다짐하듯이, 손에 닿고 만져지는 참에만 진리는 미더웠다.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은혜, 나를 믿어?" "믿어요." "내가 반동분자라두?" "할 수 없어요." "당과 인민을 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두?" "그럼 어떡해요?" "은혜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와?" "모르겠어요." (광장, 문학과지성사 130-131p)

 

하지만 전쟁과 사회 구조적인 폭력은 그의 순수하고도 간절한 삶을 뭉갰고, 결국 모든 믿음들을 앗아 갔다. 부채 끝의 사북자리에 선 명준은 중립국을 택하고, 그로 가는 배에서 갈매기 두 쌍이 은혜와 그 딸임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된다. 전쟁과 폭력적인 사회가 최후의 믿음을 앗아간 순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최인훈은 명준이라는 순수한 인간형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다. 최인훈이 명준을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아간 것은 당시 사회의 불투명한 폭력의 실체를 제대로 벗겨 보려 한 것이다. 따라서 <광장>은 결국 이러한 사회 모순과 폭력을 낱낱이 드러내고 믿음과 사랑이 있는 진실한 삶을 구하고자한 소설이다.

 

 명준의 행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휴머니즘 정신에 근거하여 인간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명준은 항상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가 좌절한 것도 단순한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 은애, 윤혜 등 사람을 거쳐 그 골이 깊어진 것이다. 이처럼 얼핏 보면 명준은 매순간 회의를 품은 지독한 회의주의자 혹은 염세주의자로 보이지만, 오히려 매순간과 삶을 사랑 했고 그래서 언제나 치열했다. 그의 삶은 세상에 대한 실존적 질문들로 가득 찼으며 그래서 결국 명준은 방황한 것이다.

 

 

 

6. 지독한 허무주의에서 부활로

 

 앞에 실은 <나의 침실로>에서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는 단순한 생의 종말이 아니라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원한 삶을 꿈꾸는 마음으로부터 온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시의 죽음에 대한 예찬은 곧 추악하고 괴로운 현실을 부정하고,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삶의 세계를 향한 간절한 염원의 역설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광장의 결말 또한 과연 단순한 비극일까? 최인훈은 2012년 발간한 바다의 편지중 단편소설에 관한 인터뷰에서 한 생애로는 부족하다고, 무한히 부활하겠다고 언급한다.

 

나는 없어지겠지. 어쨌든 한번은. 그리고 머나먼 미래의 어느 날 나는 나이면서 이 우주가 그때까지 마련하고 있을 놀라운 기억 재생장치 -몇 천억 광년의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녹음 재생장치-를 갖추기도 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겠지. 그때 이 바다의 지금의 이 무섭고 슬픈 기어도 물론 재생되어 그때 내가 들을 수 있고 어머니도 들으실 수 있겠지. 그러나 이 무서운 이야기도 우주의 힘을 제압한 인류가 되어 있을 우리, 그때의 어머니와 나를 절망시킬 힘은 이미 가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무서운 과거를 우리는 무서운 남의 이야기처럼 감상하고 난 다음에 그 슬픔이 다만 과거의 슬픔의 기록에 지나지 않음을 다짐하는 의식처럼 어머니와 나는 아주 질 좋은 차를 마실 것이다. 먼 먼 미래의 어느 날.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희망을 바다의 편지경우에는 무한 증폭한 거지. 부활까지 하겠다는 희망을 보인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백골이 되면, ()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했지만 내 입장은 달라요. 한 생애로 부족하고 부활 하겠다. 무한한 미래에 부활하겠다. 무한한 부활하겠다. 몇 번이면 되겠나? 무한히 무한하겠다. 그런 욕심을 부려보는 겁니다. - (바다의 편지삼인. p.524), 최인훈 yes24 인터뷰 중

 

 무한히 부활하겠다는 최인훈의 정신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 역시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무수히 반복하여 살아가는 삶에의 의지를 이야기 하였다. 이쯤 되면, 명준 또한 다시 태어났을 것만 같다. 믿음을 좇았던 명준의 순수한 구도적 자세가 좌절될수록 우리의 세상과 삶을 치열하게 돌아보게 한다.

 소설 초반에 등장했던 전선생이 수집한 미라의 이미지가 덧칠해 떠오른다. 미라처럼 그는 어디선가 불멸의 존재로 계속 우리 곁에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다. 그것이 광장이라는 텍스트 혹은 최인훈이 보여준 치열한 시대적 성찰과 그 정신이든 말이다.

 우리는 이 문제작이 나온 지 어언 70년에 가까워져 간다. 2017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 밀실과 광장은 제대로 존재하고 있을까? 넘쳐나는 이데올로기, 믿음, 관념들 속에서 우리의 실존은 안녕한가? 혹은 당신의 삶은 어떠한 허위와 흉내 없는 진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가? '광장'에서의 사랑은 결국 믿음과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열쇠처럼 주어졌으나, 세계의 폭력은 이를 모두 앗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속 재생 장치와 같은 '광장'을 읽으며 다시금 꿈꾼다. 진실한 사람과 사랑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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