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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

<12의 성난 사람들> - 그들은 왜 화났을까? 본문

영화

<12의 성난 사람들> - 그들은 왜 화났을까?

보통의 성연 2018. 3. 11. 15:34

12 angry me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들의 논증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열두 명의 배심원은 부친 살해 사건에 대한 사형 판단을 내리게 된다. 처음에는 한 명만이 유죄라 여기기 어렵다는 ‘not guilty'를 외쳤지만, 다른 열한 명의 사람들은 모두 유죄임을 주장했다. 사람의 존엄한 생명이 달린 문제임에도, 야구 경기 혹은 자신의 저녁시간을 사람들은 더 중요시 한다. 데이빗 흄의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신의 여가시간은 소중하지만,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는 무감각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시간이 진행될수록, 한 배심원의 적극적인 논증에 모두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 땀에 젖은 성난 배심원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그러나 그들의 논증이 모두 타당하지는 않았다. 특히, 논증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편견들이 눈에 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은 으레 그렇다거나, 전과 5범에 학대를 당한 아이는 폭력적일 것이라는 등, 노인이라면 자신의 말이 쓸모 있기를 기대할 것이라는 등 말이다. 이러한 편견으로 가득 찬 논증은 명백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 배심원의 말처럼 편견은 언제나 진실을 가린다.


 이런 와중에 배심원8은 증거물과 목격자의 증언에 대해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며 소년의 유죄를 회의하는 논증 과정을 펼친다. 전차가 지나갈 때의 상황, 특이하지만 구하기 쉬운 잭나이프, 목격자들의 증언의 허술함 등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고 따져본다. 결국 다른 배심원들은 차차 설득되었으며, 종국에 열두 명의 배심원 모두 유죄임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not guilty'를 주장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실제로 그 소년이 유죄였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의견이 논증 과정을 통해 수정되었다는 것이고, 그 문제가 한 인간의 존엄한 생명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화를 보면서 자주 들었던 생각은 ‘다들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윽박지르는 성난 목소리들이 정말 시끄럽다’였다. 이런 과정에서 차분하고 신중히 토론하면 될 것 같지만, 배심원들은 불같이 화낸다. 우리는 영화의 제목과도 관련 있는 ‘화’에 주목 해 볼 필요가 있다. 다들 왜 그렇게 화났을까? 이는 논증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논증 과정은 사안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고, 결국 이는 스스로가 갖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각자가 내린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편견, 상처 그리고 콤플렉스는 수치감과 분노로 드러나게 된다.


12 angry me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인터넷과 sns에는 현재 수많은 논쟁이 오간다. 그러나 그 논쟁이 ‘논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마트폰의 뛰어난 접근성으로 인해, 서로의 생각을 더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진정한 소통의 장이 되었는지 의문이다. 짤막한 글들은 각자의 신념과 의견으로만 점철되어있으며 기사의 댓글은 숫자에 호소하는 ‘추천 수’대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결국 일 방향 소통으로 그치게 된다.  애초에 현재의 플랫폼은 사안에 대한 사려 깊은 논증을 담을 수 없는 구조다. 기사를 읽자마자 바로 밑의 (논증이 부재한) 짤막한 댓글을 접한다. 댓글들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 태반이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있는 인터넷 뉴스 댓글만 봐도 분노와 감정적 반응들만이 흘러넘친다. 자본과 결합한 매스 미디어들은 사실과 무관한 소위 '댓글 알바'로서 개인의 불안과 분노만을 양산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논증을 통한 사고의 정교화 과정을 일반인이 접하기 쉽지 않다. 결국 현재의 대중 매체는 각자의 분노가 범벅된 쓰레기통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설득해보려 했던 사람은 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주장과 믿음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자주 감정적으로 이어져서 화로 번진다는 것을. 이때, 말의 이치인 ‘논리’는 모든 갈등 상황을 해결해 줄 마스터 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타당한 논증과 정교한 논리로 점철된 의사소통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만약 이성과 논증으로 하여금 많은 갈등이 해결되었다면, 정의와 평등의 문제, 종교 문제, 사형제도 및 인간 존엄과 인권에 관한 많은 문제, 전쟁 등 수많은 사회 문제 해결에 실마리가 보였어야 한다.


전쟁 어린아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진 : 시리아 내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 깊고 정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피도 눈물도 없으며, 어쩌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기계적 인간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와 이성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의 합리와 이성은 현상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치를 따지게 해준다. 특히 이러한 과정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12 angry men’에서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배심원들이 논증 과정을 거칠수록, 그들의 숨겨진 사연과 상처, 개성적 성격이 드러나는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그렇게 각기 다른 개성적인 배심원들은 각자의 통찰 과정의 끝에 소년의 ‘not guilty'를 주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에서는 소년의 살인 행위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전히 주장을 뒤집은 배심원들이 틀렸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이성은 불완전하고, 복잡 다단한 세계 속에서 명확한 진실을 좇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논증 과정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배심원8이 처음에 왜 혼자만 'not guilty'를 주장하는지에 관한 질문의 답이 그곳에 있다. ‘나까지 유죄로 투표하면 소년은 곧 죽게 될 것이 아니요.’

 

 앞서 언급한 흄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인디언이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곤경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의 완전한 희생을 선택하는 것 역시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논리(論理)는 유일한 이성적 판단의 수단이다. 그러나 진실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결국 논리는 신중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존중,  실존에 대한 이해, 소수자에 대한 배려, 정의 등과 같은 덕목과 함께 가야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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