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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

사막으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본문

일상의 단상

사막으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통의 성연 2018. 8. 25. 19:39

 

작은 바람

성연

 

 

 

 

무미건조한 하루들

 

 

 

르네 마그리트, 골콩드(1898), 메닐 컬렉션

 

일상은 쳇바퀴처럼 반복된다. 특히 출근 시간의 지하철에 사람들을 보다보면 앉은 자리 그대로 가라앉을 것 같다. 모두 비슷한 복장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무채색의 옷과 허옇게 질린 얼굴. 대부분 잠을 청하거나 핸드폰을 쳐다본다. 무미건조한 그들을 보고 있는 머릿속은 피곤에 치여서 더 뿌옇다. 인터넷에서는 출근길에 죽지 않을 정도로 차에 치이고 싶다.’는 누군가의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직장인들은 퇴사를 고민하고, 학생들은 으레 그렇듯 성취에 대한 압박에 쫓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입시, 취업, 직장 생활이라는 사회가 정한 틀 속에서 하루하루를 건조한 표정으로 버틴다.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 북어 대설주의보 민음사 1983

 

 최승호는 이러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찍이 포착했다. 생명력을 잃은 무기력한 사람들의 모습은 먼지 속의 꼬챙이가 꿰어있는 북어와 닮아 있다. 바다 속의 싱싱했던 명태는 어느 순간 빠삭 말려진다. 눈은 생기가 사라지고 입은 벌려진 채로 벙어리가 된다. 지하철에서 입을 벌리며 졸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딱 그것과 닮았다. 이미 바싹 말라버린 명태를 바다 속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지만, 보낸다고 해서 예전처럼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건조한 그들은 이미 죽음이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과 같은 무력감이 찾아온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놀이들은 사라지고

 

 

이중섭, 봄의 아동(1953), 개인 소장

 

화가 이중섭 선생님은

우리나라 소와 함께

아이들을 많이 그리셨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아이

거꾸로 선 아이

게에 물린 아이

이상한 아이들만 그리셨어.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아이

꽃밭에서 뒹구는 아이

노는 아이들만 그리셨지.

아이들은 노는 것도 따분한지

훌러덩 옷을 벗었어.

점잖지 않게

고추도 달랑달랑

선생님은 누구도 나무라지 않으셨지

선생님 그림 속의 아이들은 모두 벌거숭이야.

 

고광근 벌거벗은 아이들 2006

 

 유년 시절의 하루하루는 놀이로 가득 찼다. 노는 것 이외의 일들은 얼른 해치우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는다. 어떤 장소든 놀이터가 되고, 모험이 된다.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몇 시간씩 논다. 놀이터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구멍을 몇 시간씩 파기도하고, 아프지도 않은 친구에게 약초라며 풀을 빻아 주기도 한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순수로 가득 차있어 어떠한 합리와 목적이 없다. 걱정도 근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어 논다. 시와 그림처럼 아이들은 그냥 노는 것도 따분한지 옷을 훌렁 벗고 있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원시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잘 먹고, 잘 놀고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란다.

 

커버린 지금은 다르다. 어느 순간부터 즉흥적인 놀이들은 사라지고, 일상은 쳇바퀴를 도는 듯하다. 바쁜 일상 중 겨우겨우 만난 친구와도 딱히 무엇을 할지 모르고, 어딘가 놀러 가기엔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귀찮다. 결국 그 길로 술을 먹으러 간다. 못 만났던 시간들을 채우기 위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말은 꼬인다. 어느새 얼큰하게 취하고 안주를 배불리 먹다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그 길로 집에 정신없이 도착하면 하루는 취한 채로 막이 내린다. 다음날은 머리가 깨질듯 한 숙취로 범벅된다. 일탈의 미묘한 기쁨과 숙취의 괴로움이 범벅된 채로 지리멸렬한 월요일은 다시 시작된다. 어느새 어른들에게는 놀이가 사라졌다. 자유롭게 마음껏 뛰놀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막으로 떠나기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유치환, 행문사, 1947

 

 

 생명의 서에서는 원시의 를 찾으러 사막으로 떠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실존을 고민하기 위해, 아무런 생명이 없는 극한의 사막으로 떠났다는 점이다. 절대의 고독 속에서만, 원시 본연의 자태인 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화자는 병들어 앓는 자신의 생명을 소생시키고자 먼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다. 그 곳은 마치 태양이 지구 바로 앞에 있는 듯, 숨 막히는 더위와 함께 모래만 가득하다. 사막을 홀로 걸으며 원시의 를 더듬는다. 알라신 역시 처럼 고민하고 방황한다는 점에서, 시적 자아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다. ‘의 이미지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화자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절대적 진()의 극점에 다다르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참다운 를 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곳에서의 죽음을 택할 것이다.

 

 삶이 회의와 번민으로 가득 찰 때, 허무나 감상에 안착하지 않고 생명의 서는 생의 참 모습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가 결국 본연의 자태를 구했을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막에 도착하자마자 금세 본연의 를 마주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낮에는 숨 막히는 열사熱砂, 밤에는 극한의 추위가 도사리고 있다. 생명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고독 속에 홀로 유폐되어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한없이 걸어간다. 사막의 순례자인 낙타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말없는 낙타처럼 는 과묵하게 목적지마저 잊어버린 것처럼 끝없이 나아간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 신경림. 창비. 2008

 

 

신경림의 시 속의 화자는 낙타에 자신을 투영한다. 낙타는 세상사에 초월하여 지극한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사막을 묵묵히 걸으면서 봤던 별과 달 그리고 해가 그에겐 전부이다. 화자는 낙타와 같은 마음으로 생을 마감하기를 바란다. 아니, 만약 생을 다시 살아가야 한다면, 아예 낙타가 되고 싶다. 이 때는 삶의 재미와 먼, 어리석고 가여운 한 사람을 길동무 삼아 나아가고 싶다. 결국 길동무도 낙타도 모두 와 같은 존재다. 앞으로 그들은 별과 달 그리고 해와 함께 살아갈 뿐, 삶의 지극한 슬픔과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

 

일종의 유언장 같은 이 시는 생명의 서처럼, 삶의 극한점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있다. 저승길에서는 초연한 낙타를 타고 싶다는 지점에서, 화자의 지난 삶은 정반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온갖 슬픔과 아픔에 괴로워했을 것이며, 그의 삶은 여러 미련으로 범벅되어 있었을 테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사막에 다다라서 초연한 낙타의 태도를 결의한다. 앞으로는 무욕과 순수의 존재로서 살고자 다짐한다. 결국, 지난날의 안타깝고 가여웠던 ’, 혹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앞으로의 를 태우고 낙타는 나아간다.

 

 

 

 

사막에 도착하고 나서는 사막을 잊고

 

짐 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적어도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니체 역시 일찍이 인간의 실존 중 한 모습을 사막 속의 낙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니체는 신경림의 시에 나온 낙타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 봤다. 묵묵히 삶을 걸어가는 순례자보다는, 삶을 짐 지는존재로 본 것이다. 낙타는 참을성이 많고 복종을 잘하기에, 더운 사막에서 주인이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워도 불평하지 않고 나아간다. 이러한 낙타는 우리에게 지워진 당위와 규범을 묵묵히 짊어지는 존재를 보여준다. , 낙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여 인내하고 견디는 삶을 보낸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짐으로써 자신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매순간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며, 어떠한 과제를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수행함을 삶의 기쁨으로 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시선이나 존재감을 무시하고, 개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다. 묘한 죄책감이 언제나 뒤따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면, 부모님이나 주변에서는 꼭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니?’

주변의 성취나 인정은 언제나 삶을 얽매여 왔고, 그랬던 경험은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서 일상이 되었다. 하루를 돌아보면, 머리가 크고 나서는 온전히 나를 위해 쏟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매일은 대부분 해야 하는 일들과 그에 따른 경쟁으로 가득 찼다. 실제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온전히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소위 말하는 금수저가 아니라면) 수년간의 노력과 성취가 필요하다. 밥값하기도 벅차고 힘든 세상이다.

 

 

그림 3 민송아 낮의 낙타, 밤의 낙타(2014)

 

 

 위 그림에서도 낙타는 매여 있는 존재로 드러난다. 낙타는 자신이 온종일 묶여있었던 밤을 기억하기에, 낮에도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묵묵히 행한다. 의무감과 복종으로 얽매여 있는 낙타는 타율적 도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낙타는 자신만의 사막으로 뛰어가서, 사자로 변신한다. 자유를 획득하고자 고독을 견디며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려 하는 것이다. 맹렬한 사자는 기존의 관습, 가치, 규범 등에 저항한다.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따른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 역시 한계가 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신념에 복종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 정신의 마지막 단계로 어린아이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받아들이기에 순진무구요,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에 망각이다. 어린아이와 함께 지내본 자들은 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심각하게 싸우고도, 금세 까먹고 함께 즐겁게 논다. 그들은 언제나 망각하며, 그렇기에 삶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놀이며 창조다.

 

 

 

피딱지 덕지덕지 붙었다 흠집 남기며 떨어지던 비탈이었는데

미끄럼틀이었다.

평발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무릎을 많이 다쳐

두 무르팍 가득 문신됐던 상처와 흠집 들이

오늘 목욕하다 우연히 살펴보니 말끔히 지워지고 없었다.

상처 입을 일 재치 있게 피하며 살진 않았는데.

나이를 보니 앞으로 더 이상 무릎 찧을 일 없겠다는

경계 해제 통보인가?

간담 서늘할 새 상처 곧 들이닥칠 마당 미리 쓸어 놨다는

위험 경보인가?

통보든 경보든 달리 손쓸 도리 없지만

잠깐, ‘에게 말하고 싶다. 상처 많은 삶이라도

애써 별일 아닌 듯 상처들을 살다 가게 했다.

이젠 내보일 만한 상처 하나 흠집 하나 남아있지 않다고?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치게.

 

무릎, 황동규. <연옥의봄>. 문학과 지성사. 2016

 

 

 

그림 4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1897) 뉴욕 현대 미술관

 

 앙리 루소의 그림 속 누워있는 집시의 미소를 보라. 밤의 사막에 담요 하나 깔고, 아무렇게나 누워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편해 보인다. 사자는 이를 신기한 듯 동그란 눈으로 쳐다본다. 니체의 말에서도, 앙리 루소의 그림 속에서도, 황동규의 시에서도 우리는 삶을 어떻게 흘려보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유난히 자주 넘어지던 지난날들이었다. 자주 넘어졌던 원인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평발 때문인 것 같다. 무릎은 피딱지가 가득가득했었고, 지금은 그랬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이 무릎은 깨끗하다. 유달리 깨끗한 무릎은 이제는 그럴 일 없다는 메시지 같기도, 더 큰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경고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붙잡고 살아왔고 시간은 흉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각과 내면의 힘을 선사했다.

 

타인에게도, 자기 스스로에게도, 지난날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이고, 나는 나인 나일뿐이다. ‘유목적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로워 보이는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것이다. 어디든 들러붙어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하되, 그 대상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어떤 것과도 접촉할 수 있고, 언제든 다른 존재로 변이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유목적 능력이다.

 

그렇기에 나의 삶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살리기 위해 굳이 사막을 찾아갈 필요는 없겠다. 어디서든 놀이의 장소로 인식하는 어린아이처럼 현재에 몰입하여 즐겁게 지낸다. 넘어져서 무르팍에 피가 철철 흘러도, 상처를 까먹고 다시 웃는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자신의 본질로 품은 자는, 낙타의 의무도 직시하고 사자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많은 것들에 연연하며 깊게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잎 속의 검은잎>. 문학과 지성사 1989.

 

 희망이니, 청춘이니 하는 말은 어느새 나에게 죽어버린 말이 되었다. 괜히 고까운 그 단어들은 마음을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하루하루를 버티는데도 바빴다. 그러나 위의 시의 첫 행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시작한다. 화자는 비가 온 뒤 말라가는 나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듯, 노트를 쓰다가 천천히 덮는다. 어떤 글을 마쳤나보다. 화자는 집을 떠나 왔고, 지나간 추억들은 망각하였다. 더러 남은 추억들에 덜 깬 개들은 희망을 노래하려는 그를 깨문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 가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소멸하는지내 노트는 모르며, 모를 것이다. 많은 의심들이 있었고, 많은 길들이 있었다. 화자는 허투루 길을 걸어온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희망을 노래하겠다 결심한 순간, 지나가는 자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겠다. 그저 지금 이곳에 주저앉아 희망을 노래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불안은 새로운 희망을 감시하지만, 그들까지 모두 머물러 가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을 늙었다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이처럼 희망을 품는 존재다. 일생의 많은 것들을 다 경험하여 늙어 버렸음에도 희망을 떠올린다. 이러한 희망을 고깝게 쳐다보고 싶진 않다. 자조적으로 이미 늙었다 이야기하는 그를 절망적으로 바라보기 싫다. 불안과 의심으로 점철된 지난날을 망각하고, 혹은 다 품으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를 응원하고 싶다.

 

 

 이에, 많은 것들에 얽매여 버티는 자에게, 삶을 직시하기 시작한 사람에게, 늙어 버린 것처럼 많은 것에 염세적인 자에게도, 희망을 품고자 어디론가 떠나려는 자, 자유를 찾고자 무언 가를 맹렬히 쫒는 자, 그 먼 여정에서 돌아와 천진하게 웃는 자들에게 모두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렇기에 이 틀에 박힌 하루하루를 냉소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 삶이 질려버릴 때는 사막을 천천히 걷자. 그러다 아이처럼 뛰놀자. 이후 다시 낙타처럼 삶을 짐 지다가, 사자의 모습으로 맹렬히 달리기도 하자. 우리는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은 다른 꽃을 수놓고 있다. 문뜩 지난날들을 돌아봤을 때, 다양한 꽃들이 제각기 아름답게 풍성히 수놓아져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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