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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성연 2020. 6. 18. 20:34

  내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은, 소위 말하는 인프라가 없는 개발제한구역이었다. 삐까뻔쩍한 신도시들과 달리, 그곳은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항상 제자리에 낡고 후지게 있었다. 친구들 중 몇몇은 그곳이 볼품없다며 탈출할 것을 계획과 목표로 삼았던 듯싶다. 맞는 말이다. 대부동산 시대에 걸맞은 투자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소위 말하는 질 좋은 문화생활을 누리기에는 말 그대로 별 볼 일 없는 곳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시간이 쌓아준 추억도 있고, 나고 자란 곳인데 좀 후지면 뭐 어때. 꼭 화려하고 편리한 곳에 사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처럼 서울로 나가면 되잖아?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지. 편한 부분도 많은걸. 하지만 사실 따져보면, 그곳이 나에게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과 에너지를 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 해보면, 사는 곳은 내 존재를 설명하는 데 큰 지분을 차지하니까 방어적인 태도가 앞섰던 것이다. 친구들의 자조적인 말에 사실, 그런가? 여기는 영 아닌가? 하는 뜨끔스러운 마음이 찔러왔다.

 

  이러한 마음이 극대화될 때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 애인이 놀러 왔을 때였던 것 같다. 그들의 시선을 빌려 이곳저곳을 다닐 때, 뭔가 서울보다 확실히 후진 것 같고, 선택지가 적은 듯싶고, 딱히 특별히 갈 데도 없고, 건물들이 너무 낡고 오래된 듯했다. 그들이 이 장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씁쓸한 눈치를 보았다. 괜히 그들이 놀러 오면, 귀하신 분이 행차하여, 대접하고 모시고 가야 한다는 무의식이 깔렸다. 코스를 짜고, 가볼 만한 곳을 책임지고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실, 그곳에 사는 것이 약간(약간이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다.) 부끄러울수록, 내 존재에 대한 미묘한 수치로 이어졌던 것 같다. 태어난 곳은 말 그대로 물리적 배경이 아닌가. 내 배경이 사람들이 욕망할 만한 곳이 아니라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내 마음 한쪽에 있었다. 그래, 내 배경은 아주 조금 구린 편인 것 같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했을 때를 떠올려 본다. 서울은 참으로 볼 것도 많고, 가볼 만한 곳도 많아서 놀기에 참으로 좋았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느낌을 빌렸을 때, 역시 서울도 사람 사는 곳이었으며 주거 단지 쪽은 딱히 특별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그렇지만, (천문학적인 집값에서 나오는 바이브와 별개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모이며, 그곳을 많은 이가 욕망하고 있다는 중심지로서의 당연한 여유가 있는 듯했다. 평범하게 구리고 외진 동네도 어쨌든, 서울이니까-로 정리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안에 속한 사람의 여유, insider의 느낌이랄까.

 

  어느덧 떠밀려 새로운 곳에 터를 잡게 되어 생각한다. 이곳은 또 다르게 개성적으로 구리구나. 유흥업소는 왜 이리 많고, 건물들은 다 낡았는지. 쓰레기 분리수거는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채로 맨날 널브러져 있고, 교통은 참으로 불편하고,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공업 도시라 그런지 매일매일 칙칙하고 꼬질하다. 여기도 사람들이 열심히 자라나고, 만나고, 사랑하고, 부대끼며 사는 곳일 텐데, 나는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곳에 자취하는 것이 썩 마음에 차지 않는다.

 

  다들 어떻게, 또 어떤 곳에서 살림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일까?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태어난 곳이 아닌 곳에서 터를 잡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의 부모는 어떻게 그 멀고 작은 곳에서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을까. 떠밀려 가는 삶과 생업의 여러 선택지 중,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곳에 집을 구하고, 나를 낳고, 나를 무럭무럭 키운 것인가. 그때의 마음과 고민, 생각이 궁금해지는 바이다.

 

  다만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 모두의 배경이 밝고, 조화롭고, 깔끔하고, 특별하여 평안과 행복이 깃들어 있길 바랄 뿐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환경조성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안정적인, 만족스러운 삶이 전제되어야 하겠지. 오늘 또 어린 학생들을 보며 느낀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배경을 수치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길. 괜스레 더 나은 나와 우리의 배경을 만들기 위해 애써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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